글 황효진
[잘 만든 히어로영화는 배우들을 스타로 만든다. 비단 영웅뿐만이 아니라, 악당의 경우까지 그렇다. 정교하게 설계된 판타지와 뚜렷한 캐릭터, 배우 각자의 개성이 꼭 맞아 떨어진 순간 작품은 폭발력을 가지며, 배우들은 인기와 도약의 기회를 동시에 거머쥐게 된다. <어벤져스>의 출연자들이 인지도를 높인 동시에 상당한 팬덤을 거느리게 된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현재 국내에서 상영 중인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이하 <캡틴 아메리카 2>)와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 역시 좋은 예다. 두 작품은 속편의 기능을 비교적 충실히 수행하고, 등장인물들의 매력을 놓치지 않고 드러낸다. 그래서 <아이즈>는 두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 중 몇 명을 골라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레벨업을 이루어냈는지 살폈다. 캡틴 아메리카 역의 크리스 에반스부터 윈터 솔져 혹은 버키 역의 세바스찬 스탠, 럼로우 역의 프랭크 그릴로(이상 <캡틴 아메리카 2>), 스파이더맨 역의 앤드류 가필드와 해리 역의 데인 드한(이상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까지 총 다섯 명이다. 이 배우들을 더 많이, 깊이 알고 싶은 이들을 위해 입구가 될 작품들도 정리했으니 참고하자.
*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와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크리스 에반스, 진정한 대장님
캡틴 아메리카의 몸이 더욱 두툼해졌다. 스판을 버리고 스텔스 수트를 걸치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매일 부위별 운동을 4세트씩 쉬지 않고 반복한다는 크리스 에반스의 습관 덕분일 것이다. 그래서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이하 <캡틴 아메리카 2>)에서 그의 커다란 덩치와 옛날 만화 속 미소년 같은 얼굴이 불러일으키는 이질감은 한층 더 선명해졌다. 어색하다거나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의 외모가 이번 작품과 만난 순간, 캡틴이 꿈꾸는 높은 이상과 직접 몸을 부딪쳐 그것을 현실화하는 행동력은 동시에 설명되었다. 한편으론 촬영 준비의 일환으로 체조와 복싱, 주짓수, 가라테 등을 병행해온 덕분인지, 크리스 에반스는 한층 더 유연하고 박력 있는 액션을 선보인다. 특히 대역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좁은 엘리베이터에서의 격투신은 이 배우가 몸을 잘 써야하는 캡틴 아메리카에 얼마나 가까워졌는지를 증명해낸다. “이제 자네가 대장인 것 같군, 캡틴”이라는 닉 퓨리(사무엘 L.잭슨) 국장의 말처럼, 크리스 에반스는 이제 영화 속에서도 바깥에서도 대장님으로서의 아우라를 당당하게 발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니 아무리 야수처럼 덥수룩한 수염을 길렀다고 해도 격렬한 환영으로 예의를 표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다행히도, 항간의 소문과는 달리 이 남자는 배우 인생을 끝낼 계획이 전혀 없다고 밝혔다. 모처럼 호감 가는 대장님을 잃을까 초조해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입문자 추천 코스: <판타스틱 4>, <내니 다이어리>, <당신은 몇 번째인가요>
초능력자든 대학생이든, 크리스 에반스는 외모와 몸매를 전면에 부각시킨다. 휴먼토치인 자니 스톰으로 등장했던 <판타스틱 4>에서는 샤워타월로 아슬아슬하게 하체만 가린 모습을 선보이기도 했으며, <내니 다이어리>에서 크리스 에반스의 별칭은 ‘하버드 섹시남’이다. 심지어 <당신은 몇 번째인가요>는 벗은 채 기타를 치고 벗은 채 욕조에 들어가 있는 등 크리스 에반스의 벗은 몸을 시도 때도 없이 노출했다. 사실 가장 강한 수위의 노출신은 코미디 영화 <섹스 아카데미>에서 찾아볼 수 있으나, 굳이 추천하지는 않겠다. 벗은 몸 곳곳을 생크림으로 장식했던 흑역사는 당사자나 관객들이나 그냥 덮어두는 편이 낫다.
세바스찬 스탠, 슬프도록 아름다운 인간병기
<캡틴 아메리카 2>의 부제가 ‘윈터 솔져’인 만큼, 세바스찬 스탠이 등장하는 장면은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짜릿한 순간이다. 온몸과 얼굴까지 무장한 채 홀연히 나타나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공격을 감행할 때의 그는 캡틴 아메리카 못지않은 카리스마를 풍긴다. 무게감 있는 걸음걸이와 절도 있는 움직임은 <퍼스트 어벤져>에서 댄디함을 뽐내던 버키가 맞나 싶을 정도다. 다만 마스크가 벗겨졌을 때 드러나는 그의 얼굴은, 마치 안경을 벗고 청순가련형으로 거듭난 순정만화 속 여주인공급의 충격을 안겨준다. 히드라의 살인병기가 되어버린 버키의 슬픈 운명은 세바스찬 스탠의 사슴 같은 눈에서 충분히 읽어낼 수 있으며, 말하는 대신 명령받은 대로 행하기만 하는 처지는 앙 다문 입술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아름다움을 바탕 삼아 분노와 무력함을 자신만의 독특한 분위기로 빚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과거를 각성시키려는 캡틴 아메리카를 향해 “넌 내 임무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가도, 바다에 빠진 그를 뭍으로 데려다 놓고 떠나는 모습에서는 어쩐지 순정남의 기운마저 느껴진다. 크리스 에반스, 크리스 햄스워스와는 또 다른 스타일의 청순 글래머가 탄생했다. 덕분에 세바스찬 스탠의 존재감은 크리스 에반스를 훌쩍 뛰어넘고 있는 중이니, 윈터 솔져가 되기 위해 평소 하지 않던 식단 관리까지 강행한 보람은 충분할 듯하다.
입문자 추천 코스: < S 러버 >, <커버넌트>, 드라마 <폴리티컬 애니멀>
<가십걸> 출연 당시엔 레이튼 미스터와, <원스 어폰 어 타임>에서는 제니퍼 모리슨과 교제하는 등 1 작품 1 여자친구 정도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는 세바스찬 스탠이지만, 적지 않은 감독들은 그를 브로맨스에 활용하고 싶어 했다. < S 러버 >에서는 바람둥이 니키(애쉬튼 커쳐)와 투닥투닥하는 귀여운 친구였으며, <커버넌트>에서는 원수처럼 지내던 친구와의 싸움을 거친 입맞춤으로 마무리하는 초능력자였다. 그리고 <폴리티컬 애니멀>에서는 아예 약물중독에 빠진 게이를 연기했다. 역시 아름다움의 힘은 상대를 가리지 않는 법이다.
프랭크 그릴로, 남자 중의 남자
<캡틴 아메리카 2>에서 처음 등장한 프랭크 그릴로는 크리스 에반스나 세바스찬 스탠과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남자다. 그가 쉴드 스트라이크 팀의 팀장, 럼로우를 연기한 것은 더없이 좋은 캐스팅이었다. 각진 얼굴과 짙은 눈썹, 약간 꺼진 눈, 무엇보다 단단한 팔뚝이 돋보이는 외모는 조직과 원칙을 묵묵히 따르는 럼로우의 성격을 잘 설명해낸다. 캡틴 아메리카나 피어스 국장(로버트 레드포드)의 뒤를 그림자처럼 지키고, 임무 수행을 위해선 재빨리 움직이는 등 든든한 사냥개 같은 캐릭터를 충실히 그려내는 것이다. 결국 배신의 아이콘으로 등극했으나 까실까실한 수염조차 이상하게 멋있어 보이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놀라운 사실은 프랭크 그릴로가 무려 1963년생, 올해로 52살이며 세 아이의 아빠이기도 하다는 것. 젊은 시절에는 좋은 신체조건을 이용해 남성 헬스 잡지의 모델로 활약하거나, 데오드란트 광고 등에 출연했으며 과감한 올 누드 화보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리고, 1992년부터 영화 및 드라마에서 경력을 쌓아온 그에겐 지금 이 순간이 데뷔 22년 만에 찾아온 황금기라 할 수 있다. 팬들은 원작을 근거로 그가 다음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에서 빌런 중 한 명인 크로스본즈로 다시 출연할 거라고 추측 중이나, 그는 “거기에 대답하면 마블이 나를 해고할 것”이라며 입을 꾹 다물 뿐이다. 그러니 추궁하는 대신, 프랭크 그릴로의 팔뚝을 다시 보게 될 날을 조용히 기다리도록 하자.
입문자 추천 코스: <인터섹션>, <엔드 오브 왓치>, <워리어>
국내에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프랭크 그릴로는 꾸준히 상남자의 캐릭터를 다듬어 왔다. 사막이 주 무대인 <인터섹션>은 풀어헤친 셔츠와 금목걸이로 그의 무심한 섹시함을 강조했고, <엔드 오브 왓치>의 감독은 그에게 팔뚝이 드러나는 경찰 제복을 입혔다. 하지만 프랭크 그릴로가 가장 빛나는 작품은 격투기 코치로 등장한 <워리어>다.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이 영화에서 그는 팔뚝의 문신마저 자신의 매력으로 만든다.
앤드류 가필드, 더 친근해진 스파이더맨
앤드류 가필드가 원래 <스파이더맨>의 광팬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마크 웹 감독과의 미팅 당시, 스파이더맨 의상을 입고 찍은 어릴 적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앤드류 가필드는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 많은 남자다. 인터뷰 도중 자신의 내면에 있는 다섯 살짜리 아이에 대해 설명하거나, 일을 하지 않을 때는 <더 보이스> 혹은 <배첼러> 같은 서바이벌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즐겨 본다고 고백하는 식이다.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는 그의 실제 성격과 좀 더 가까울 법한 현실적이고도 유쾌한 스파이더맨을 보여준다. 세상을 구하려다 여자친구 그웬(엠마 스톤)과 틀어지고, 피로에 찌든 채 시민을 구하는 한편 사람들 사이에 섞여 농담을 하거나 어린 소년과 놀아주기도 한다. 1편의 찌질한 천재 아웃사이더 피터 파커와는 사뭇 다른 캐릭터가 되었지만, 앤드류 가필드는 적당한 여유와 긴장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작품을 무리 없이 이끌어간다. 게다가 실제 연인 사이이기도 한 엠마 스톤과 함께 더 깊어진 사랑의 감정을 그려내며 짙은 멜로의 주인공으로도 손색이 없음을 증명한다. 지금껏 어두운 눈빛과 구부정한 포즈로 불안한 소년의 얼굴을 주로 보여주었던 앤드류 가필드가 누구보다 친근한 히어로가 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앞으로 그가 뻗어 나갈 수 있는 폭이 훨씬 더 넓어졌음은 말할 것도 없겠다.
입문자 추천 코스: < 보이 A >, <네버 렛 미 고>,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
불안한 동시에 너무나 순수해서 세상에 좀처럼 섞여 들어가지 못하는 듯한 느낌은 앤드류 가필드의 트레이드 마크다. < 보이 A >는 그런 그의 분위기를 영화 전체의 긴장감으로 활용했다. 14년간의 복역을 마친 후 세상에 복귀한 소년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이상할 정도로 불안감을 조성하고, 앤드류 가필드는 움츠러든 어깨와 머뭇거리는 말투로 불편함을 극대화시켰다. 또한 <네버 렛 미 고>에서 그는 세상의 잔인함을 모르는 복제인간이었으며,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에서는 가진 것 없고 순진한 탓에 토니(히스 레저)에게 좋아하는 여자아이를 빼앗기고 마는 소년이 되기도 했다.
데인 드한, 바스러질 듯한 악당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의 해리 오스본은 로키만큼 우아하진 않지만, 그 이상으로 매력적인 악역이다. 데인 드한은 불안하고 유약한 자신의 기존 캐릭터를 밀어붙여 결국 히어로물까지 진출했다. 어린 나이에 오스코프의 사장이 되었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고,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비열하고 집요해질 수밖에 없는 해리의 처지는 시나리오보다 데인 드한이라는 배우를 통해 구체화된다. 그는 일그러뜨리며 애써 웃는 표정과 비음 섞인 낮은 목소리, 필요에 따라선 아이처럼 애절한 말투로 보는 사람의 마음을 홀린다. 거미의 피를 잘못 주사하는 바람에 고블린으로 변했을 때조차 사악하다거나 징그럽다기보다는 여전히 날아갈 듯 약해 보여서 쓰다듬어주고 싶은 느낌을 준다. 언제나 남성 배우들과 최고의 케미스트리를 자랑했던 그답게 피터와 해리의 관계 역시 우정과 애정, 애증 사이의 어디쯤으로 절묘하게 그려내기도 한다. 몇몇 장면에서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가 해리의 사랑과 좌절에 관한 작품으로 느껴질 정도다. 분량은 그리 많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데인 드한은 존재감을 뚜렷하게 남겼고, 더 많은 관객들이 그의 이름을 외우기 시작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닮은 신인에서 시작해 그를 능가하는 배우가 될 것은 시간문제다.
입문자 추천 코스: <로우리스: 나쁜 영웅들>, <크로니클>, <플레이스 비욘드 더 파인즈>
데인 드한의 필모그래피를 정리하는 단어를 꼽자면, 불운과 결핍이다. <로우리스: 나쁜 영웅들>에서는 낙이라곤 친구 잭 본두란(샤이아 라보프)과 노는 것밖에 없는 절름발이 소년이었고, <크로니클>에서는 우연히 초능력을 얻었으나 히어로가 되지 못한 볼품없는 고등학생이었다. 아버지로부터 내려온 운명에 휘말린 소년이었던 <플레이스 비욘드 더 파인즈>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때마다 데인 드한은 누군가에게 흠씬 두들겨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