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ny Finger Point

https://www.kmdb.or.kr/story/9/4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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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우보이의 노래>의 여섯 에피소드들은 대부분 잠재적 순환구조를 갖고 있다. 1편의 깝죽대던 카우보이 버스터는 또 다른 총잡이와의 결투로 갑작스레 죽는다. 새로운 총잡이 역시 언젠가 그렇게 죽을 것이다. 하늘로 날아오르던 피살자의 영혼이 살해자와 함께 노래하는 장면은 그들의 동일한 운명을 유머러스하게 암시한다. 2편의 실패한 은행 강도는 교수형 당할뻔하다 살아나지만 황당한 계기로 다시 목을 매달린다. 3편의 팔다리 없는 음유시인은 버림받은 뒤 '수학하는 닭'으로 대체되지만 명민한 닭 역시 언젠가 음유시인의 운명이 될 것이다. 음유시인과 닭을 끌고 겨울 들판을 통과하던 늙고 초라한 쇼맨 역시 같은 운명을 맞을 것이다. 5편의 젊은 웨건마스터는 한 여인과 맺어져 정착의 새로운 삶을 시작할 뻔했지만 그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실패한다. 지나치게 과묵한 늙은 웨건마스터의 젊은 시절도 아마 그러했을 것이다.

 

이들의 나선적 순환의 삶의 끝은 모두 죽음이다. 그러니 마지막 에피소드의 좁은 포장마차 안에서 저마다 자신의 삶이 특별하다고 뽐내던 다섯 인물이 결국 공동묘지와도 같은 호텔 안으로 사라져가는 음울한 결말은 적절한 마침표다. 이 에피소드들에서 죽음은 장대하고 비극적인 죽음이 아니라, 우연적 사고에 의한 어처구니없는 죽음이거나, 인물과 서사의 개별성과 관계없이 예정된 죽음이다.

 

http://m.cine21.com/news/view/?mag_id=9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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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1 ’버스터 스크럭스의 노래’에서 총잡이 버스터 스크럭스(팀 블레이크 넬슨)는 연예인의 기질을 타고났다. 그는 화려한 노래와 총질로 시종 관객의 이목을 끈다. 그런 그가 다른 이에게 시선을 빼앗기는 순간이 단 한번 등장한다. 자신을 ‘죽음의 전조’라고 소개한 총잡이가 등장하는 순간이다. 넋을 놓고 바라보던 버스터 스크럭스가 말한다. “듣기 좋은 소리를 내더군.” 곧 닥칠 불행을 예상치 못하고 아름다운 광경에 넋을 놓는 얼굴이 여기에서 처음 등장한다. 우리는 영화를 은밀히 지탱하는 이미지와 처음으로 마주친 셈이다.

 

에피소드2 ‘알고도네스 근방’에 등장하는 남자(제임스 프랭코)는 기가 막힌 타이밍마다 도움을 받아가며 죽음의 고비를 넘긴다. 그런 행운조차 죽음으로 이어진 길이었을까. 그는 결국 죽음을 피하지 못한다. 이상한 것은 그 직전에 등장한 묘한 이미지다. 군중 속에 홀로 선 새파란 원피스의 아가씨. 사내는 온통 사랑에 빠진 듯 아련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본다. 곧이어 그 시선을 단죄하듯 재빨리 사형이 집행된다. 사내와 버스터 스크럭스의 얼굴이 포개어진다. 우리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 무언가를 홀린 듯 바라보는 얼굴과 다시 한번 마주친 것이다.

 

에피소드3 ‘밥줄’은 여러모로 이질적인 에피소드다. 한톨의 웃음도 허락하지 않는 황량한 공기도 그러하지만, 가장 이질적인 것은 팔다리가 없는 남자(해리 멜링)의 존재다. 그는 청아한 목소리로 공연을 반복하지만 무대 밖에서는 말을 하지 않는다. 다른 이들이 섹스를 할 때조차 그는 뒤돌아 앉은 채로 크고 우울한 눈을 깜빡일 뿐이다. 이 장면들은 남자의 소외된 처지를 환기시키지만, 나는 좀 다른 측면을 언급해보고 싶다. 그는 관객의 자리에 앉지 못하고 언제나 이야기꾼의 자리로만 소환된다. 매니저(리암 니슨)는 섹스 전에 그를 돌려 앉히며 그가 관객이 될 수 없음을 주지시킨다. 마을 사람들 모두 닭을 구경할 때에도 그는 그 자리에 없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이야기가 생명을 다할 때까지 몇번이고 무대를 반복할 따름이다. 그에게는 미혹적인 광경에 넋을 놓는 순간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관객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기 때문이다. 이 에피소드는 오로지 이야기로만 소비되는 이야기꾼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관객의 자리를 상기하게 한다. 매혹적인 풍경과 마주치는 관객의 자리 말이다.

 

에피소드4 ‘황금빛 협곡’의 노인(톰 웨이츠)은 금맥과의 만남을 고대한다. 마침내 번쩍이는 황금맥과 만나는 순간, 그의 뒤에는 노인을 응시하는 사내가 있다. 그 위로는 그들을 내려다보는 새와, 모두를 품는 대자연의 풍광이 있다. 사내가 새를 다시 올려다보고, 노인은 자연의 조각(광물)에 비친 사내를 훔쳐본다. 여기에는 서로 물고 물리는 거대한 응시의 고리가 있다. 응시와 미혹은 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의 관객이며 서로에게 매력적인 풍경이다.

 

에피소드5 ‘겁먹은 처녀’에서 앨리스 롱거바우(조이 카잔)는 돌아온 강아지를 들고 활짝 웃고 있다. “저 생물체를 파악하는 중인가 봐요.” 시종 차분하던 그녀의 웃음은 반갑지만 어딘가 섬뜩한 측면이 있다. 그리고 상황 파악을 못하는 강아지를 보고 웃던 그녀는, 상황을 착오하는 바람에 죽고 만다. 쥐를 보고 짖는 개와 그런 개를 보고 웃는 여자. 미혹의 순간들은 러시아 인형(마트료시카)처럼 서로를 품으며 더욱 크게 확장된다.

 

그리고 마지막 에피소드 ‘죽을 자만 남으리라’에서 현상금 사냥꾼은 마치 사람들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사자처럼 느껴진다. 그가 말한다. “제가 주의를 끌면 클래런스가 후려친답니다.” 이 말은 앞서 죽음으로 연결되는 그 매혹적인 장면들에 대한 비유로도 들린다. 날이 저물어가고 이야기와 노래가 이어진다. 그들을 정신없이 보다 보면 어느새 화면이 어두워지고, 우리의 눈앞에서 호텔의 문이 굳게 닫힌다. 그제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여태 이 수상한 마차에 우리도 동승하고 있었음을. 지금 우리의 모습은 개를 보고 웃던 앨리스와 얼마나 다른가. 그리고 마지막 장이 넘어간 책이 눈에 들어온다. <카우보이의 노래>는 결국 우리를 마지막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코언 형제가 건넨 매혹적인 이야기인 것일까. 그들의 생각을 알 수는 없지만 이것만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카우보이의 노래를 듣는 것은 관객의 자리에 앉는 것이며,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에도 아름다움에 기꺼이 미혹되는 일임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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