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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닷컴] 최근 개봉한 ‘색, 계’는 일본의 앞잡이로 동족을 탄압한 매국노 이(양조위)를 암살하기 위해 신분을 감춘 채 접근하는 왕치아즈(탕웨이)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애초 두 사람은 의심과 증오를 밑바닥에 깔고 상대를 대했지만, 어느 순간 서로에게 격렬히 탐닉하면서 감정이 급변합니다. 


사랑에 빠진 이가 사랑에 빠진 치아즈에게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못했던 과거를 털어놓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난 치아즈가 위로합니다. “많이 외로웠군요.” 그러자 이가 조용히 내뱉습니다. “그 덕에 살아 있는 거지.” 


외로움이란 삶이 처하는 특정한 상태를 지칭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삶의 조건에 더 가깝지요. 외로움을 견뎌낼 수 있는 사람만이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할까요. 어쩌면 생명이란 고독을 견뎌내는 힘을 뜻하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이때 사랑은 스스로의 고독을 발견하고 당황하게 되는 자가 찾아나서는 미로 같은 것일 겁니다. 사랑을 추동하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기 힘들어 하는 약한 속내인 것이지요. 


이와 치아즈는 강한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이는 누구에게도 속을 드러내지 않고 어디에서도 빈틈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권력과 부를 누릴 수 있었던 사내입니다. 치아즈는 매국노 암살이라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을 만큼 신념과 의지가 강한 여자입니다. 그러나 고독이란 삶의 조건을 묵묵히 받아들였던 이 두 강자는 상대를 만나고 스스로의 외로움을 인지하는 순간, 약자로 변합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생(生)에 잠시 허락된 황홀한 혼란에 빠집니다. 


이 영화는 제목에 등장하는 두 가지 요소인 ‘색’(色)과 ‘계’(戒)가 끝없이 맞물리면서 진행됩니다. 서로에게 빠져들기 전, 두 사람은 ‘계’의 경계 안에서 각각 위엄 있게 머뭅니다. 그러다 함께 ‘색’의 상태로 진입하면서 함께 마구 흔들립니다. 결국 한 사람은 ‘색’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벗어나 ‘계’의 세계로 복귀함으로써 삶을 이어가고, 다른 한 사람은 ‘색’의 경계 안에 머물기를 선택함으로써 삶을 끝냅니다. 


‘색’이란 단수인 ‘나’가 복수인 ‘우리’를 지향하는 상태입니다. 함께 있을 때의 충일감을 아교 삼아, 쓸쓸한 단수가 뜨거운 복수로 존재의 확장을 꾀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아교의 효력은 한시적이고, 삶은 결코 복수일 순 없습니다. 

이 영화의 끝에서 계의 세계로 복귀한 이가 치아즈 없이도 삶을 계속 이어갈 수 있을까요. 아마도 그는 이따금씩 깊은 밤에 문득 깨어 외로움에 몸부림칠 겁니다. 가끔씩 헛헛한 속을 쓸어 내리며 한숨을 내쉴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오래오래 계속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러시아 감독 알렉산더 소쿠로프의 영화 ‘어머니와 아들’에서 병으로 죽어가는 어머니는 홀로 남을 것을 예감하며 안타까워하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있단다. 그것은 불행도 재앙도 아니야. 그저 너무도 슬픈 일이지.” 삶이 슬픈 것은 혼자 살아야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삶은 결국 혼자 살아낼 수 있는 것이기에 슬프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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